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문단 편집) === [[2차 대전]] 말기와 최후 === 하지만 전쟁이 심화되고 독일이 세계적으로 고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외교의 중요성이 급감함에 따라 리벤트로프가 지녔던 정치적인 영향력 역시 빠르게 줄어들어갔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히틀러가 불가침 조약을 위반하고 소련을 불시에 침공하자]] 자신이 맺은 불가침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전쟁 개시에 반대하며 독소전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https://ru.wikipedia.org/wiki/%D0%94%D0%B5%D0%BA%D0%B0%D0%BD%D0%BE%D0%B7%D0%BE%D0%B2,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_%D0%93%D0%B5%D0%BE%D1%80%D0%B3%D0%B8%D0%B5%D0%B2%D0%B8%D1%87|블라디미르 데카조노프]]를 불러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메모를 건내준 뒤, 리벤트로프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모스크바에 전해주시오. 그래도 나는 대소 전쟁을 반대했다고.[* 리벤트로프는 외무장관이고, 외교관 입장에서는 전쟁이 터져봤자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 오히려 대소전은 자기 최고 성과라 자부한 불가침 조약을 갈아엎는 짓이기 때문에, 리벤트로프가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독소전쟁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을 겪으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으며,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지던 1945년 4월 20일,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의 56세 생일 파티에 참석했고 이것이 히틀러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파티 후에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10일 후인 4월 30일,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종전 후 리벤트로프는 [[카를 되니츠]]에 의해 해고되었는데 그 후에 6월 14일에 [[함부르크]]에서 숨어 지내던 리벤트로프는 영국 점령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파일: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jpg|width=100%]] || ||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나치당 고위급 인사들.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발두어 폰 시라흐]], [[프리츠 자우켈]]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ibbentropDetentionReport.png|width=100%]] || || ▲ 리벤트로프의 [[머그샷]]과 관리 기록 카드. ||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피고로 호출됐고 감금되었다. 그러나 감금된 후에도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재판 당시 자신의 행위를 모두 부정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보다 절대 영향력이 못하지 않았던 거물 인사이자 외교 실력자, 그리고 전쟁의 책임자이며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의 주범'''으로 죄가 인정되었고 결국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사형 선고를 들은 직후 반응이 걸작이다. >'''죽음, 죽는다라... 이제 내 아름다운 회고록을 못 쓰게 되는 건가.''' >(Death, death. Now I won't be able to write my beautiful memoirs.) 본래 괴링이 먼저 교수대에 올라야 했으나 그가 자살해 버리는 바람에 처음으로 교수대에 오른 리벤트로프는 사형 직전 [[유언]]으로 > '''신이시여, 독일을 지켜 주소서!''' > '''Gott schützt Deutschland!''' 라고 외친 뒤에는 > '''나의 마지막 소원은 독일인이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과 동서양이 서로 이해하는 것이오. 마지막으로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 (My last wish is that Germany realize its entity and that an understanding be reached between East and West. I wish peace to the world.) 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사형이 집행될 때 소련이 전 사형수 교수형 집행을 고통스럽게 집행하도록 요구함[* [[독소전쟁]]으로 인해 2000만에 달하는 국민을 갈아넣었던 소련 입장에서는 나치 전범 사형수들이 롱 드롭으로 편하게 사형당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치 전범들 중 사형수들은 전부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집행하라고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에 따라 이에 맞춰 줄길이가 조절되었고, 리벤트로프는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 원래는 총살형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소련의 요구로 교수형이 됐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2/Deadjoachimribbentrop.jpg/280px-Deadjoachimribbentrop.jpg|처형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리벤트로프의 유해는 자살한 괴링을 포함한 11명의 핵심 전범들과 함께 [[뮌헨]] 근교의 화장장으로 옮겨져 소각되었고, 유골은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